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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위안부에 대한 잔학 행위와 관련하여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최근 한국 법원 판결과 관련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준비하던 참이었다. ‘위안부’란 당시 전쟁 중인 일본제국군에게 전선의 ‘위안소’에서 성 서비스를 제공하던 여성들과 소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시아 여성들은 물론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강제로, 혹은 속임을 당해 위안소로 보내졌지만 이들 대다수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이었다. 피해자 수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월 23일 일본은 담화를 발표해 한국인 위안부 12인(7인은 2013년 소송 개시 이래 사망)에게 피고인 일본 정부가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도록 한 한국 법원 판결에 대해 “매우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은 한국의 재판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미 과거에 해결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법적 결정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해결 혹은 악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다.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진실에 대한 갈등과 부정의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이상 그 트라우마가 그냥 지난 일로만 치부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1월 31일, 내가 몸담고 있는 하버드 로스쿨의 재학생들과 동문들에게서 연락이 이어졌다. 오랜 동료이자 일본법 중 기업법 전문가인 J. 마크 램지어 교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램지어 교수라면 나도 면식이 있는데, 남편과는 자전거도 같이 타고 우리 부부에게 일제 식도는 뭐가 좋은지 조언을 해준 적도 있는 60대 후반의 겸손한 학자였다. 조부모와 부모 모두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미국 메노파 선교사였던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학자 램지어의 주전공이 전후 일본 경제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전환적 발상과 주장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재학생들과 동문들은 램지어 교수가 한국 언론 1면을 장식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최근 그가 투고한 2건의 글에서 위안부 관련 역사적 통설을 반박하는 주장을 펼친 탓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피어리뷰 학술지 『국제법경제학리뷰(IRLE)』 온라인판에 공개된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 그리고 보수 민족주의 성향으로 알려진 일본 산케이신문의 온라인 영문판인 ‘재팬 포워드(Japan Forward)’에 1월 12일자로 실린 논평을 통해 램지어 교수는 자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밝혔다. 2편의 글을 모두 읽어 보면 그의 주장은 오해의 소지 없이 명확했다. 위안부였던 한국 여성들이 강제로, 또 강압이나 기만으로 인해 성노예 생활을 하고 폭력의 협박 속에 감금당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램지어 교수는 그런 강제성 주장이 “전적으로 허구”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한국 위안부 여성들이 “매춘을 선택”했으며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지역 내 전선의 “사창가”에서 일하기로 업자들과 “다년 소속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램지어 교수는 게임이론을 빌어 자발적 선택에 따른 성노동이었음이 이러한 계약의 경제적 구조에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는 것이 매춘부였고, 아시아에서는 그 대상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었다.

램지어 교수의 글은 일본 매체에서 우호적으로 보도된 후 한국으로, 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단순히 학계 수준을 넘어 까다로운 한·일 양국 외교 관계는 물론 양국 모두의 동맹국으로서 조심스러운 미국의 역할에까지 잠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논쟁적 주장이었다. 미 의원 2인은 램지어의 주장이 “역겹다”며 트위터에 글을 올렸고, 미 국무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성 목적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인신매매는 끔찍한 인권 침해”임을 재차 강조했다. 램지어 교수 일로 나한테까지 연락이 오는 건 특히나 내가 동양계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또 한국계 여성으로 최초이자 유일한 하버드 로스쿨 종신교수란 사실 때문이란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우리 부모님은 한국전쟁 중 이북의 고향을 뒤로 하고 피난을 떠났다. 나의 위치, 한국계이자 여성이란 점, 사법 관련 글을 쓴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침묵은 곧 “공모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동문도 있었다.

램지어 교수의 논리를 어느 정도 소화한 후 나는 그에게 연락을 해서 조만간 공개적으로 이견을 밝힐 계획이지만 그가 학술 연구를 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학문의 자유를 행사한 것에 대해서는 기관 차원의 징계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더라도 동참하거나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나는 소셜 미디어에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해 짧은 비판글을 올리면서 계약서 분석은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협상을 가정으로 하는 것이며, 거부나 외면 같은 선택지 없이 의무적으로 성관계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계약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무력, 위협, 기만, 강압으로 인해 징발되고 감금됐다는 위안부 여성들의 진술을 믿었다면 램지어 교수는 분명 그런 주장을 펼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램지어 교수는 위안부 여성들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그의 말을 빌자면 그런 주장들이 “자기 위주”고 “확인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서 애초부터 믿지 않기로 했고, 그러한 결정이 그의 견해에도 반영된 것 같았다. 반면 램지어 교수는 위안부 여성들의 주장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신뢰하는듯 했다. 일본 정부가 밝힌 입장들 간에 모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최대한 너그러운 시선으로 동료 교수의 글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의 관점이 어쩌면 학자로서 그의 일평생 연구 주제가 되어온 통념에 대한 회의론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사안에 있어 민족주의, 인권과 관련하여 격렬한 감정을 자아내는 주제에 대해 사실, 논리, 해석을 두고 비판과 이견을 살펴보는 접근법을 취했다. 램지어 교수 주장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보다 심도있는 분석을 거쳐 평가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 과정이 그토록 단순명료하면서도 혼란스러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일본, 피해자-가해자, 여성-남성 간 갈등으로 축소해서 아주 간단한 문제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인 사안임에도 역사학자들은 전쟁으로 고통받던 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던 위안소 수백여 곳,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수많은 경험이 얽혀있는 위안소 제도와 그 의미에 대해 신중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학자들간에는 여성 조달과 관련해 민간 모집업자와 더불어 일본군의 정확한 역할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다. 한국에서 같은 한국인을 속여 넘긴 한국인 모집업자들의 역할, 그리고 딸을 데려가도 반대하지 않은 궁핍한 가족들 등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여전히 무척 어려운 문제다. ‘성노예(sex slavery)’라는 표현이 주로 동산노예제(chattel slavery) 맥락에서 나오는 단어임을 감안할 때, 잔인하게 감금한 상태에서의 남용과 강간이라는, 소유 개념과는 또 다른 위안부의 성격을 이 단어가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논쟁이 되어왔다. 위안부 여성들이 경험한 무력이나 강압의 정도는 각기 다를 수 있어도 폭력과 협박은 고질적 요소였다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내용이다. 이와 반대로 램지어 교수의 주장은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일부러 단순화해 버리려는 것 같았다. ‘한국 위안부 여성들은 자의에 따라 전선에 나간 매춘부였다’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의 항복과 2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한국·대만·만주·서태평양 지역 내 일본 식민 지배의 종식과 함께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 사과, 부정의 70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1951년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양국 관계는 정상화됐고, 양국은 각국의 “재산, 권리 및 이익[…]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으며 그에 대한 “조치[…]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합의하였다. 위안부 여성들과 관련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었기에 후일 이들의 청구권도 해결된 것인지와 관련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성범죄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낙인을 찍던 과거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수십 년간 널리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1993년 일본은 분수령이 된 ‘고노 담화’를 발표하면서 위안소 설치 및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여성들을 모집하는 과정에 일본군이 관여했으며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일본은 나아가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히며 “이런 역사의 진실을 […] 직시해 가겠다”고 약속하고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2006년 아베 신조 전 총리 취임 후 일본은 ‘고노 담화’의 입장을 철회하는듯 보였다. 한·일 근현대사 전공의 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의 말을 빌면 아베 정권 하의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 “객관적인 역사 탐구가 설 자리가 없는” 환경이 되었다. 2014년 일본 외무성이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위안부 관련 사진을 삭제하도록 맥그로힐 출판사를 압박하려던 시도가 그 단적인 예다. 출판사 측은 역사적 사실을 확립하는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며 일본 외무성의 요구를 거절했다. 아베 전 총리는 이에 “항의해야 할 것을 항의하지 않고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지 못해 미국에서 이런 교과서가 사용되는 것”이라며 탄식했다.

2015년 20명의 미국 역사학자들(뉴요커 필진 중 한 명인 젤라니 콥도 참여했다)은 미국역사학회(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발행지에 성명을 내고 위안부 관련 “최근 역사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려고 한 일본 정부의 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저지른 잔학 행위를 지우려는 일본의 노력을 “교과서를 재집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 이야기를 지워버리려는” 미국 여러 교육위원회의 노력에 빗댔다. 일본 근현대사 분야의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교수도 이 성명에 참여했다. 같은 해 고든 교수와 더든 교수는 위 성명과는 별도로 위안부 관련 성명을 추진했고, 세계 각국의 일본사 전공 학자들 수백 명이 이 성명에 참여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기념하며 이들은 성명을 통해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잡혀가고 끔찍한 잔혹 행위를 당했다는 증거가 명확하다”며 “과거의 흔적을 하나 하나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맥락에 따라 평가할 때에만 올바른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사학자는 “역사 탐구의 자유”를 옹호하고 각국 정부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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